[에세이]얼음 위의 드로잉 - 피겨 스케이팅과의 인연

클레어

살면서 어떤 것들은 꼭 내가 추구하지 않았는데도 내 주변을 맴돌다가 문득 찾아온다. 그렇다고 인생을 아무런 바람이나 구상도 없이 사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되돌아보면 바라지 않았던 것들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강한 힘으로 내 인생을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내게 찾아왔던 20대 후반의 춤도 그랬고, 그것도 부족했는지 홀연히 다가온 피겨 스케이팅도 그렇다. 궤도를 벗어난 삶이 내면으로는 자유와 행복을 주지만 밖의 세상과 얼마나 많은 부딪힘을 만드는지 익히 알고 있기에, 이 우연한 손님을 또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미 하얀 얼음 위의 세상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풀리지 않을 마법에 빠져버린 것과 같고 아마 세상의 어떤 마약보다 강한 최음제를 마셔버린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내가 빠져 버린 얼음 위의 세상에서 내 몸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 얼음처럼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에 대해 하나씩 그려보고자 한다. 

2018년 어느 날, 인연의 시작

나는 몸과 움직임을 주로 작품을 만드는 창작예술가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창작활동의 일환으로 내 스튜디오나 기관에서 창작과 움직임에 관련된 수업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피겨스케이팅을 배우는 아이들 몇 명이 그룹 지어 피겨에 도움이 되는 수업을 해달라고 찾아왔다. 빙상장 근처에도 안 가본 나에게 피겨 하는 애들이란 티브이에서나 보던 것들이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다른 별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을 이 쪽 별에서 만나는 것과 같이 별난 마주침과 같았다. 


수업을 앞두고 피겨 스케이팅에 관련된 여러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무용과 피겨가 신체 움직임 혹은 테크닉의 접근법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글을 쓰겠지만, 여태 경험한 바로는 피겨와 무용은 신발 한 켤레의 왼쪽 오른쪽과 같이 매우 같으면서도 매우 다르다.) 내가 직접 배워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피겨는 어린애들이나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미끌거리는 얼음 위에서 무시무시하게 생긴 스케이트를 신고 활주 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몸이 재산인 무용 예술가로서 쓰는 근육도 다르고 위험해 보이는 스포츠를 시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학부모 한 명이 내가 수업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중 피겨 스케이팅을 하면 잘할 거 같다고 극구 권장을 했다. 한두 번 사양하다가 결국 떠밀리듯 스케이트를 배우게 되었는데, 바로 그 날 스케이트를 내던지고 나는 계속 추던 춤이나 계속 추어야 했던 것이었다. 이 놈의 스케이트!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이유

나는 '이놈의 스케이트'를 왜 하는지 수도 없이 내게 묻는다. 심장과 머리가 내 안에서 지속적으로 부딪히며 틈만 나면 회의를 소집한다. 결정 난 안건을 또 끄집어내어 다시 검토를 하고 집요한 토론을 한다. 아직은 가슴의 결정이 우세하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내 머릿속의 회의 장면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슴

피겨 스케이트 타고 싶어

그냥 좋으니까

너무 행복하니까

재미있으니까


머리

이제 배워서 뭐하려고 그래?

김연아가 될 것도 아니잖아

부상의 위험이 있잖아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 미쳤어?

아무리 한다 해도 불가능할 기술도 많잖아

 

그러면 내 의식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각종 구실들을 찾아낸다;


유튜브에 나오는 Yvonne Dowlen는 90살이 넘었고, Sheila Cluff는 80살이 넘은 스케이터야

대회를 나갈 건 아니지만 원하면 28세부터 75세까지 참가할 수 있는 세계 성인 스케이터 대회도 있어

나는 피겨 스케이팅을 하려는 게 아냐, 얼은 물 위에서 춤을 추려는 거지

그러니 내 춤을 중단하는 것도 망치는 것도 아니라 이건 단지 안무 창작의 연장선에 있는 거라고!

현란한 스핀과 점프가 없이도 얼음 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아

김연아의 최근 안무도 그렇고, 싱글 스케이팅처럼 점프와 스핀을 구사하지 않는 아이스댄싱도 그래

좋은 무용 작품이 고난도의 기술 자랑이 아니듯이 난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나의 스케이팅을 하려는 거야

피겨 스케이터의 지상 훈련에 도움이 되는 효율적인 표현과 움직임 수업을 기회가 되면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리고 스케이팅 기술과 경기 규칙에 대해 배운다면 피겨 스케이팅 안무도 할 수 있겠지

별난 어떤 게 아니라 등산이나 수영처럼 이것도 그냥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타면 되는 거야


물론 이것은 도대체 왜 피겨 스케이팅에 빠져있는지 나도 모르겠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납득해보려는 위로 같은 변명일 뿐이고, 현실의 내 모습은 혼자만 즐거운 채 얼음 위를 서성이는 겨우 얼음 위에서 발걸음을 뗀 왕초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또 어떠한가.


지금부터라도 빙상장에 안 가면 스케이팅은 내 인생과 무관한 것이 되고, 세상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냥 안 가면 된다' 하면서도 내 몸은 동시에 주섬주섬 스케이트를 챙기고 길을 나서고 있다. 나는 늘 오늘이 마지막 타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빙상장에 간다.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날은 전날부터 설레인다. 그냥 좋아하니까 이걸 한다. 마냥 행복하니까 이걸 한다. 빙상장에서 나오면서 나는 한 없이 행복하다. 세상에서 그 순간 나는 가장 행복하다. 하늘도 아름답고, 나무도 아름답고, 햇살도 따뜻하고, 모든 게 다 아름답다. 내가 죽기 전에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것을 해봤다는 것은 내가 인생에서 한 일중에 가장 특별하고 멋있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된거다. 


클레어님의 브런치에 기고된 글을 플레이콕이 한 번 더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