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첫 스파링인데 뭔 거창한 깨달음? 중년 아재, 복싱으로 배우다

끝까지 살아남으마
쒸히, 쒸히, 흐흑, 흐흐흑.
폐 깊이 고였던 낡은 숨공기가 가쁜 소리를 내며 마우스피스를 휘감아 흐른다. 상체와 주먹이 순간을 멈추는 동작에선 어김없이 같은 소리가 난다. 나를 때리는 저 사람도 같은 소리를 낸다. 


이것은 나의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이거슨 나의 주먹에서 나는 주먹이 울리는 소리여.
복싱을 시작하기 전엔, 고수의 주먹은 스스로 소리를 낸다고 맹신했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으면서도 빠르고 강한 주먹은 스스로 울음을 울린다 여겼다. 배에 힘주는 소리가 마우스피스를 악기 삼아 요상한 고수의 소리를 흉내 내는 링 위의 두 사람은 한 면이 5 미터 되는 사각링에서 멋있는 컴비네이션을 뽐낸다.

원, 투, 더킹, 어퍼, 훅, 더킹, 스트레이트, 다시 원투!
왼손잡이이면서 오른손잡이처럼 섀도우를 배운 나는 관장님이 알려준 컴비네이션대로 상대에게 주먹을 내쳐본다. 복싱은 주먹을 내치는 경기다. 팔을 내뻗어 주먹을 날리는 격투기가 아니다.
잘 생긴 주인공의 긴팔이 어깨와 함께 크게 뒤로 젖혀지면서 거친 공기의 비명을 즐기는 두꺼운 주먹이 긴 여행을 지나 아주 악하게 생긴 상대의 턱을 강타한다. 파아랑처럼 대파한 피땀이 화면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소나기마냥 터뜨려진다. 여기까지가 복싱을 배우기 이전 내가 상상했던 스파링의 모습이다.
주먹은 반드시 상체의 앞면에서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두 팔은 캥거루마냥 반드시 상체 앞에서 굽혀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먹은 반동을 위해 후진해서는 안된다. 곧바로 그 틈을 노린 상대의 강펀치는 이미 나를 찍어 꽂았을 것이다.
좌우를 흔드는 상체를 따라 주먹이 고정된 위치에서 반발 없이 내쳐져야 한다. 이소룡의 절권도처럼 강한 주먹을 선사하려고 주먹을 뒤로 빼내는 순간 게임의 승부는 끝난다. 주먹은 자기 위치에서 바로 상대에게 꽂혀야 한다. 그래야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한다.

공격과 방어는 똑같은 모양의 자세와 똑같은 위치의 주먹에서 나온다.
공격을 크게 욕심내다 팔을 후진시켜 빼내는 순간 방어선이 무너지고 상대는 벌어진 나의 상체와 얼굴에 두어 번 이상의 펀치를 찍어낼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나의 공격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방어 자세와 달라선 안된다. 오십 년 가까이 머릿속에 각인된 강한 주먹, 강한 전사, 멋진 승부와는 천지차이다.
불혹을 넘어 쉰을 바라보며 천명을 알아가는 나이다. 공자의 삶 따위에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나의 삶은 마흔도 이르지 못했다.
공자가 이렇게 일생을 회고했다고 한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
마흔 살에 사리에 미혹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

나는 세상사에 연민과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지려는데 큰 당위성을 부여하며 크게 욕심내었고, 숨기려는 것을 크게 아끼며 깊이 그리고 두껍게 감싸 안았다. 나는 아직 마흔에 이르지 못했다.
생물학적 나이는 쉰을 향해 가빠르게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나의 삶은 지나간 마흔 이전의 흙탕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5미터짜리 좁은 사각링 안에서, 노련한 상대에게 보란 듯이 크게 주먹을 휘두를 거라고 내보였고 그렇게 허우적대는 주먹이 공중을 어지럽히는 동안 상대의 주먹은 내 면상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진작 복싱을 배웠다면, 나의 마흔이 유혹의 덫에 만신창이 나지 않았을 텐데.
세상의 소중한 이치와 가르침을 이렇게 깨닫는다. 이게 천명이라면, 지금 나도 불혹을 잘 지나 열심히 지천명으로 향하는 순례를 즐기고 있지 않을까?
가지려는 욕망과 지키려는 욕심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 욕정에 눈이 멀 때, 내 삶이 저만치 멀어졌다. 눈멀지 않고 오욕하지 않을 때, 내 삶은 순례의 다음 단계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섀도우 때처럼 팔과 주먹을 붙이고 정자세로 스파링에 임하는 한, 쉽게 다치지 않고 지지 않는다. 그리고 3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크게 울리면 상대를 껴안고 등을 주먹으로 두드려줄 수 있다. 신선한 깨달음이다.
2분 30초가 지나면 곧 1라운드가 끝난다고 알리는 작은 부저가 울린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라는 경종인데, 막상 스파링 때 이 소리를 들으니 눈 앞이 캄캄해진다. 우이씨. 아직도 남았어?
숨이 목구멍에서 정체되어 뇌로 가는 산소가 차단된 느낌이다. 다리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내 지친 약점을 숨기고 상대를 위협하려는 본능으로 팔을 마구 휘젓는다. 컴비네이션이고 섀도우의 기본이고, 나발이고 하나 없다. 개싸움판이다.
링의 종이 고막을 찢고 들어와 이제 그만 해도 된다, 라는 달콤한 아테나의 귓속말을 전한다. 멋있게 상대를 안아주려던 호기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얼른 그의 등을 두드려준 뒤 글로브를 벗어 정수기로 향한다. 세 컵을 쉼 없이 들이키고 주저앉았다. 관장이 뭐라고 떠드는데 듣고 싶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당분간 하지 말자!



끝까지 살아남으마님의 브런치에 기고된 글을 플레이콕이 한 번 더 소개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으마

언제나 읽을 만한 글로 일생을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