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운동장에 있던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삐삐

열여섯의 늦은 가을, 나는 한참 드라마 태릉선수촌에 빠져있었다. 드라마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사랑과 꿈에 대한 내용이었다. 유도하는 남자 주인공의 넓은 가슴팍에 중학생 소녀의 가슴은 쉴 틈 없이 벌렁거렸다. 금메달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려는 주인공들의 풋풋한 모습은 청춘 그 자체였다. ‘그래, 어른이 되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드라마를 보며 어렴풋이 나의 20대를 상상했다.


그쯤 우연히 알게 됐다. 같은 반 친구 예슬이도 <태릉선수촌>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금요일 밤에만 하는 8부작 단막극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이 재밌는 드라마를 나 혼자만 본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던 참이었다. 헐 너도 그 드라마를 안다고? 우리는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사이였지만, 같은 드라마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금방 친해졌다.


그다음 우리는 만화 <슬램덩크>로 넘어갔다. 강백호의 투지에, 정대만의 여유로움에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흘리는 땀이 부러웠다. 높은 여름 기온에 비실비실 흐르는 내 땀방울과는 차원이 다른, 농도 짙은 땀이었다. 우리는 그해 겨울 내내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너에게 가고 있어~” 슬램덩크 OST를 흥얼거렸다. 그다음 단계는 축구장. 우리는 자연스럽게 축구를 보러 몇 번 축구장을 갔고, 우연히 TV를 돌리다 중계 중인 배구 경기를 보고 배구 경기장까지 찾아갔다. 그렇게 우리의 열여섯은 스포츠를 구경하는 관람객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가 스포츠에 한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학교 교복 치마는 빨간색 잔 체크무늬였는데, 무당벌레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색과 빨간색의 조합이 촌스러웠다. 고등학생이 되면 드디어 예쁜 교복을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야, 교복 예쁘게 입으려면 한 5킬로는 빼야 할 것 같지? 본격적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한참 이소라 다이어트 비디오가 유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네모난 모니터 화면 속에서 수영복만 입은 채 열심히 팔 운동하는 이소라 언니를 분주히 따라 했다. 엄마가 밤에 피자빵을 사 와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독하게.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태릉선수촌을 보고 미래를 꿈꾸고, 슬램덩크를 보고 감동받고, 축구를 보러 다니면서 선수들이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주인공은 ‘남자’였고 같이 운동을 하는 사람들 모두 ‘남자’였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서 여성은 강백호가 짝사랑하는 대상으로, 또는 코치로 등장했다. 단편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우리가 찾아간 축구도 남자 축구, 배구도 물론 남자 배구였다. 남자가 주인공인 스포츠 물 안에서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들의 열정을 응원하는 ‘여성 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이 나와 거리가 멀게 느껴진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고정시킨 전형적인 여성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 것 같았다. 아기 때부터 갖고 놀았던 미미공주 인형도 그랬고, 만화와 드라마 속 여주인공도 그랬다. 한참 싸이월드를 강타했던 유명한 얼짱들도 그랬다. 모두 머리가 길고, 피부는 하얗고, 날씬했다. 그런데 운동하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그 반대였다. 중학교 때부터 반에는 운동하는 여자 친구가 꼭 한 명씩 있었는데, 그들은 대게 피부는 새까맣고, 머리는 남자처럼 짧았다. 교복도 치마 말고 바지만 입고 다녔다.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점심시간 후엔 어디론가 휙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같은 반 친구라는 생각보다, 그저 ‘운동하는 애’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만약 내가 운동을 한다면? 나도 저 친구처럼 피부가 까매지고, 머리도 짧게 잘라야 하잖아! 거부감이 먼저 찾아왔다. 귀밑 20센티까지 머리를 기를 수 있는 학교 규정도 마음에 안 드는데,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자른다고? 말도 안 돼.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하얘진다는 로션을 선생님 몰래 찍어 발랐던 나이에, 까만 피부를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내가 스포츠 물 주인공들처럼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축구장에는 짧은 머리의 남자들이 축구를 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저 멀리 관람석에 앉아 그들을 구경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피부는 하얗고, 머리는 길고, 뚱뚱하지 않은 몸으로, 예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 관람객의 자리가 딱 내 자리인 것 같았다. 우리는 강백호의 농구 성장기를 보고 환호했지만, 만화가 끝난 현실에선 이소라 다이어트를 열심히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나와 죽이 잘 맞았던, 그 시절 관람객으로 열여섯을 함께 보낸 예슬이에게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직접 농구나 축구를 배워볼 생각을 못 했을까. 운동장 밖에서 관람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운동장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예쁘게 앉아 응원만 하는 삶 말고, 잔디를 밟고 땀 흘리는 삶도 충분히 멋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운동장 밖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지금은 증발해버린 재능을 가진 여자들은 얼마나 많을까. 그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삐삐님의 브런치에 기고된 글을 플레이콕이 한 번 더 소개합니다.

삐삐

왜 나는 불행한지 계속 탐색중입니다.